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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밤이 있는 한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는 문장

2022-11-02
몽진_모먼트 몽진_모먼트_곽민지


글, 사진ㅣ곽민지




‘술과 밤이 있는 한,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 술덕후로 살아온 38년 인생을 돌아보면 희대의 유성애주의적, 그중에서도 이성애주의적인 이 문장에 동의해야만 성숙한 연애 인구로 인정받는 구간이 있었다. 아마도 대학교 졸업반쯤 되어서 헐렁하게나마 삶의 지혜를 대충 걸쳤다고 믿을 때 주고받는 말이 아닐까 싶다.

이진송 작가가 비연애 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에서 지적하듯 이 사회는 연애를 반드시 해야 할 것으로 권장하고 연애하지 않는 자는 어딘가 결핍된 존재로 바라보지만, 사회가 승인하는 연애의 폭은 또 엄청나게 좁아서 다양한 연애 중 20대의, 대학생의, 이성애자의 연애만을 추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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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utterstock



‘술과 밤이 있는 한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고 할 때 가장 먼저 그려지는 것 역시 어느 웹드라마에서의 대학생 술자리 3차쯤이다. 야 니가 여자냐, 야 얘가 무슨 남자냐, 우린 빨개벗고 있어도 아무 일 안 생겨(대체 이런 가정은 왜 하는가?) 해놓고 술 취해 쓰러진 과친구들 사이 두 사람의 눈빛이 파바박 부딪치는 그런 순간.

삶에서 술과 함께 무르익어간 것이 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저 문장의 진위를 두고 벌어지는 설전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깨달은 것이라고 하겠다. 술, 밤, 남녀, 친구. 이 모든 것은 각각 수천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마치 깻잎 논쟁을 듣는 사람 중 깻잎 덕후는 “그런 거 고민할 시간에 한 장이라도 더 집어먹자” 할 수 있듯이, 술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술 덕후들은 저런 거 따질 시간에 한 잔이라도 더 먹자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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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중반의 어느 날, 이미 여러 번 거절했으나 더 거절할 방법이 없었던 소개팅이 있었다. 상대는 언변이 대단한 방송인이었고, 나 역시 현장에서 말로 승부해야 하는 일이 많은 방송작가였다. 서로에 대해 들은 정보는 술 좋아하니까 친해지기 좋을 거라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소개팅이었고, 우리 둘은 모두 이성애자였고, 술 덕후라는 사전정보가 교환된 이상 술을 작살나게 먹을 각오로 만났다.

1차에서 그는 안동소주를, 나는 맥주를 먹으면서 아이스브레이킹을 했다. 강압적인 한국 음주문화를 학습한 사람으로서, 그가 아무 지적을 안 했는데도 3배속으로 맥주를 마셔서 내가 술을 빼는 사람이 아님을 어필하고자 했다. 누군가는 이 장면을 보고 ‘여자가 남자 되게 좋아하나 봐, 막 퍼마시네.’ 하겠지만 그 당시의 나는 그저 그에게 예의 없는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그와의 1차는 역시나 타고난 언변 덕분에 팟캐스트 녹음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팟캐스트 진행자이기도 하다.) 서로 본인이 MC고 상대가 게스트인 방송을 하는 느낌으로 신나게 대화하면서 술병을 비우고, 2차로 친한 친구의 바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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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는 주선자를 비롯한 공통의 스몰토크 주제를 다 빼먹었고, 인생의 흑역사와 장래 계획 이야기를 했다. 그는 집을 짓고 싶다고 했다. 휴지를 하나 테이블에 두고, 바텐더에게 펜을 빌려 그가 생각하는 집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용은 너무 특정되는 것이어서 적지 않겠지만, 그는 정말로 흥미롭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방송인이니 외모도 출중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은, 그는 정말로 좋은 술친구였다! 이 때쯤 이 정도 마셔줘야 되는데, 이거 마시면서 이런 아이템으로 토크 나와줘야 되는데 싶은 것들을 귀신같이 척척 해냈다. 나와 결이 비슷한 술쟁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그렇다면 이쯤에서 3차를 가야겠다 싶어서 다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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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는 동네에서 소문난 새벽바였다. 새벽바라는 것이 통용되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정의하기로는, 아주 늦은 시간에 문을 열어 새벽 5시 정도까지 영업하는 바였다. 늦은 시간 연다고 해보았자 밤 10시 정도고, 간단한 칵테일을 한잔하고 헤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보통은 고주망태들이 내릴 곳을 놓치고 흘러들어온 마지막 차고지 같은 곳이었다.

호기롭게 들어와서 10분 안에 잠들어서는 2시간을 풀수면해서 동행자로 하여금 바텐더와 절친을 먹게 하는 사람도 있었고, 딸보다 어려 보이는 20대 초반의 여성과 함께 와서 보틀 하나를 시켜놓고 온갖 갑질에 성희롱적인 농담을 일삼아서 이걸 내가 참는 게 주사일까 신고하는 게 주사일까 고민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런 곳에 가서, 우리는 그 사람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취한 채 이제 서로의 가족 이야기를 했다. 상담 선생님 앞에서나 얘기할 법한 각자가 가진 평범하고 다른 상처들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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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새벽 3시가 되었고, 우리는 “아, 오늘 진짜 재밌는데 너무 아쉽네요.” 하면서 헤어졌다. 다음 차로 갈 술집이 없다는 점을 아쉬워하며 헤어지면서도 서로가 알고 있었다. 이 취한 공기 속에서도 성애적인 텐션은 하나도 없었음을.

그러나 그것을 상대에 대한 폄하나 매력없음으로 읽는다면 당신은 아직 뭘 모르는 것이다. 술자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텐션 없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 소개팅과 술이 결합한 자리에서, 술을 진탕 먹으면서도 패키지처럼 따라오던 복잡한 관계의 문을 열지 않을 수 있는 존재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플러팅 없는 정중한 고주망태와의 안전한 술자리가 얼마나 즐겁고 황홀한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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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다가, 베트남에서 새해를 맞던 어느 날 자정에 그에게서 카톡이 왔다. “작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음에 같이 또 술 마셔요.” 반가운 마음으로 나도 답장을 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진짜 다음에 술 한잔해요.” 아마 그도 나도 강제적인 이유가 없다면 굳이 연락해서 술을 먹자고 만나지는 않을 것이다. 술쟁이들에게는 각자의 술쟁이 친구들이 이미 많으니까. 하지만 그날의 거절 못한 소개팅처럼, 언젠가 일하다 마주쳐 술 마실 일이 생기면 정말로 재미있을 거라 확신한다.


술과 밤이 있다면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고? 밤이 있다면 남녀 사이에도 술친구가 있다. 유명한 문장에 대한 이 해체적인 관점이, 술과 함께 익어가고 있는 삶의 한 부분이다. 다양한 관계, 다양한 술 덕후, 다양한 주정뱅이! 그런 기대를 안고 오늘도 술 마시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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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민지
@gwak.minji

방송, 팟캐스트, 책, 칼럼 등을 쓰거나 만든다.
〈걸어서 환장 속으로〉,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
〈미루리 미루리라〉, 〈난 슬플 땐 봉춤을 춰〉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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